# 마르께스는 '첫 단락만 쓰면 소설을 쓸 수 있다'라고 했지만 때로 나는 첫 단락만 읽으면 내가 꽂힐지 알수 있기도 하다..
사실 첫 페이지가 아니라 둘째 페이지에서 한 표현에 바로 꽂혀서 줄을 긋고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첫문장을 다시 읽고
또 줄을 그었다...
처음 밑줄을 그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먹을거리 없이 보내야 하는 하루처럼 길고 밋밋한 도로, 어느 사형수에게 남아 있는 날들 처럼 길고 밋밋한 - 행복한 운명을 타고난 선생님 같은 분은 그 길고 밋밋함에 대해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그런 도로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마을이었지요.
첫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생님, 비록 그렇게 될 소지가 없진 않지만, 나는 나쁜 놈은 아니올시다. 우리 모든 인간은 매한가지 가죽을 쓰고 태어나지만, 우리가 성장할 때 운명은 마치 우리를 밀랍 인형 다루듯 주물러 대고 또 여러 오솔길을 통해 죽음이라는 동일한 종말로 향하게 하면서 즐거워하지요.....
셀라라는 작가도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라는 책 제목도 몹시 생소하기만 한데 역시 노벨상은 대단하구나 싶다..
무척 재미있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느끼게 되는 건 과거의 인간의 문제와 현재의 인간의 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돌리지 않고 사회가 나누어져야 할 무게가 있다면...
80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라는 거...
언뜻 나아진 것처럼 보이는 지금도 여전히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라는 게 어쩐지...
끝없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혼란스럽다...
(205p)
# <혁명>을 읽고 뭔가 기갈이 나서 산 책..
<혁명>에서 답답했던 부분들이 많이 후련해졌다..
삼봉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더 길고 폭넓게 아우러진 책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저자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때도, 가로저을 때도 있었지만..
큰 무리없이 한 사람이 일어선다...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 이상이요, 그가 세운 나라 이상이었다. 고조선 이래 수천년간 이어 내려온
귀족 중심 체제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기도한 모반가이자, 이미 600년 전에 군주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실천한 합리주의자였다. 또한...... 국제 전략가였다. 선비이자 정략가였고, 유교 이론가인가
하면 군사 지휘자였다....... 건국의 공으로 치더라도 단연 으뜸이었다...'
저자가 이렇게 칭송해마지 않는 크고 화려한 휘장 틈새로 삼봉의 인간적이고 부족한 부분들도 엿보인다..
'(정도전)은 도량이 좁기 때문에 남을 시기하고 겁이 많았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꼭 해치려 하고,
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하려 했으며...'
정도전의 정적 이방원은 태종 재위 시절에 편찬한 태조실록에서 정도전을 이렇게 치졸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태종시절 편찬된 태조 실록에 태종의 개인적인 감정이 실렸을 것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200% 동의하지만..
여전히 난 정도전이 부처님 같은, 예수님 같은 성현의 반열에 들 인품의 소유자는 아닐 것이라 상상한다..
뭐...곧고 바른만큼 타인에게 모질고 걍팍한 면도 보였으리라..
야망없이 어떻게 혁명을 이루나, 단호함없이 어떻게 큰일을 하나...
칠땐 가차없이 쳤을테니 그 단호함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찌 올곧게만 보였으랴...
자기 생각이 다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을리도 없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데 어찌 맘속 생각과 다른 말을 하랴..
포부가 지나쳐 구설의 화를 자초했을듯 하고..
그렇지만 그가 신이 아닐진대 어떻게 사소한 결함도 없을 수가 있으랴...
결과적으로 옳지 않은 판단을 했을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예로부터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으니 인간은 그저 행하고 기다릴 뿐...
나는 나대로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41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