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의 작은 흔적

2015. 5. 1. 11:18 from 기억한올


아버지가 입원하셨다..

이런 저런 검사를 마치셨고 다행히...

제일 걱정스러웠던 암은 아니신걸로 나왔다..

한숨 돌렸다...


어제 언니와 1층 편의점에서 5층 병실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에스컬레이터로 3층까지 올라간 후

비상계단으로 2층을 걸어 올라갈 계획이었다..


에스컬레이터 뒷쪽에서 어떤 늙수그레한 남자가 거칠게 언니와 나를 밀치고 

앞으로 나서서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성큼 성큼 올랐다..

어찌나 서둘던지 거의 넘어질뻔, 위태 위태 했으나 다행히 중심을 잡아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쪽으로 헤집어진 채 언니와 나는 약간 망연히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런 사람들 보면 우리 어릴때 골목에서 봤던 사람 생각 나..'

언니가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나는 자동으로 한 장면을 떠올렸다..


30년쯤 전 일이다..

정확히 어느 나이였는지..내가 고등학생이었는지 대학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동네에는 542번 버스 종점이 있었다..

버스 종점에서 우리집으로 오는 길은 작은 골목이었는데 외등도 없이 어두컴컴한 비탈길이었다..

한겨울에 언니와 내가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아마도 같이 외출을 했던 거겠지..)

바닥이 온통 얼음으로 꽝꽝 얼어있어서 둘이 팔장을 끼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 조심 걷고 있었다..

(둘다 힐을 신었던 것 같으니 둘다 대학생이었겠다..)

앞쪽에 내려가야할 작은 언덕이 있었다.. 

그 언덕만 내려가고 나면 길이 전반적으로 편편해지는데 그 언덕이 말하자면 최대의 난관인 셈이었다..

얼어붙은 길이 달빛에 반짝 반짝 빛날 지경이었다..


뒤쪽에서 한 사람이 발걸음도 씩씩하게 저벅저벅 거침없이 걸어오더니 어느틈에 우리를 제치고 앞서 나갔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젊은 (느낌상) 남자였고 바닥의 얼음의 존재따윈 완전 무시하고 성큼 성큼 언덕길을 내려갔다..

언니와 나는 왠지 더 기가 눌려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씩씩한 남자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얼어붙은 언덕길을 내려간 그 남자는 그 기세 그대로 오른쪽 골목으로 꺽어 들어가 곧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는데 골목길로 꺽어들어간지 몇십초도 안되서 들려오는 꽈당...소리...

골목길로 사라지자마자 들려온 그 소리는 그 남자가 우리 눈앞에서 넘어진것보다 훨씬 극적이고 재미있었다..

서로 그렇게 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언니랑 나는 마음껏 웃지도 못하고 숨죽여 킥킥거릴수밖에 없었다...


다시 병원 에스컬레이터에서 나는 바로 그때 그 장면을 떠올렸고 언니에게 '언니도 그 일 기억하는구나' 하고 물었고

언니는 '그럼 어떻게 잊니.. 평생 안 잊어버릴껄?' 하고 대답했다..

우린 다시 한번 그때 그 남자와 현재의 성급했던 아저씨를 떠올리며 웃었다..

그렇게 사소한 일이 동시에 두 사람에게 각인되어 있다는 게 참 놀랍다...

한 사건을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 다르게 왜곡하거나 파편적으로 기억하는 이야기에 익숙하다가

이렇게 동시에 선명하게 기억해내는 순간과 마주치니 그것도 참 신선하다...


Posted by labosq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