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익사하지 않기 위해 계속 헤엄을 친다는 것은 비단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는 피츠제럴드 자신의 인생관이었다. 물론 그러다 언젠가는 기운이 빠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날'이 올 것이다.
"개츠비가 수영장에서 죽은 바로 그날처럼 우리가 선착장 끄트머리에 도달하고 물에 빠져 죽는 그날이."
# 코스모스에서...
'퀘이사의 에너지원이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한가지는 확실하다. 즉 전대미문의 거대한 파괴가 퀘이사 내부에서 진행 중이라는 사실 말이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퀘이사 하나하나에서 수백만 개에 이르는 세상들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을 것이다. 파괴되는 세상 중에는 생물과 그 파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생물이 살고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괴되는 순간에도 에너지의 분출과 대 혼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고민할 것이다. 고통 또한 인식 기능이 감내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 우리는 외계 은하들을 연구함으로써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벌어지는 격렬한 혼돈의 폭력 역시 우주의 한 속성이다.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은하와 별과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이다. 우주는 반드시 자비롭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적의를 품지도 않는다. 우주 앞에서 우리의 생명, 인생, 문명, 역사는 그저 보잘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전 우주적 입장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숙명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익사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버둥거려야 하는가...
하지만 하루 살이에게는 하루도 충분히 긴 일생일지도 모른다-라고 한다면
우리의 그 긴 버둥거림에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감사라는 것도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긴하다..
(우주가 저토록 무심한데 우리의 감사의 대상이 도대체 누구 혹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를 '위한'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는게 얼마나 스스로를 중요하게 위치시키는 생각인건지..말이다.. )
어쨋거나 버둥거림이 즐겁지 아니한가?
# 아주 작은 일상...
우주의 일은 우주에게 맡기고 나는 열심히 버둥거린다..
가령 이런 작고 작은 문제들의 바다 속에서 (익사할 위험이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별개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성격이나 감정의, 동기나 상태나 과정 등을 이해할 수 있어도
여전히 내 '호오'의 문제는 남는다..
왜 일까?
그건 결국 내 문제일까?
나는 왜 이렇게 형성된걸까?
난 결국 심술궂은 할머니로 늙어갈까?
무위의 버둥거림 속에서 느끼는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