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2018. 6. 6. 14:36 from 생각꼬리

# 지나고 나서 드는 생각


생각해보니 영화는 철저하게 1인칭 시점이다. 종수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다. 모든 장면 안에는 종수, 혹은 종수의 시선이 있다. 즉 모든 사건은 철저히 종수의 시점으로 재구성된다는  뜻.

우리는 종수가 선택한 혹은 선택적으로 기억한 것들만 보면서 역시나 다시 한번 우리의 기억에 의해 선택적으로 편집하여 받아들인다. 


이 부분에서 포크너.. 

영화 속에서 벤이 종수에게 묻는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고.

종수는 포크너를 좋아한다고 하고 벤은 다시 묻는다. 왜?

뭐라고 했더라... 종수는 아마도 나와 비슷해서? 뭐 이런 맥락의 말을 한다. (워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그 장면을 보며 '포크너의 소설에서 나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포크너의 소설은 단 한권 읽어보았다. [소리와 분노]

그 소설을 읽고 너무 좋다. 더 읽고 싶다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쉽게 다른 책에 대해 욕심을 내지 못했다. 

소리와 분노는 철저하게 의식의 흐름을 따랐음에도 그 파편적인 글쓰기때문에 쉽게 동일시 하기 힘들다.

서사없이 누군가의 내면의 분절적 소리 사이로 자신의 내면을 일치시키는 건 많은 상상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경험이 나를 그 장면에서 약간 멈칫하게 한 것 같다. 

포크너의 주인공들과 자신이 유사하게 느껴지는 건 어떤 경험일까?

내가 포크너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봐야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그래서 벤도 포크너의 단편소설집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 물론, 포크너에 대해 아는척 하지만 실제로 읽어본적이 없는 벤의 허위적인 교양을 폭로하기 위한 장치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종수에 대한 관심은 분명해 보인다.)


# 영화를 보고나서 든 생각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불을 켜주지 않는, 그래서 강제적으로라도 영화에 경의를 표하게 만드는 극장 아트나인..

불이 들어오고 나서 든 생각은 '뭐지?' 였다. 약간의 씁쓸함과 함께..

'칸이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네.'  여우는 포도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잠시 검색. 버닝= 분노라는 부분이 마음속으로 쏙 들어온다.


영화를 보는 나의 관점을 다시 보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으로는 영화를 쫓지만 머리속은 혼자 돌아가는 기계처럼 계속 돌고 있었다.

뭔가 이런 ... 어마어마한 영화를 만날 때 종종하는 짓이다. 

뭔가가 있을 거야. 뭔가를 나도 발견해야해. 그 의미를 나도 찾아야해..

그레이트 헝거가 되서 머릿속에서 의미모를 춤을 추고 있다. 


내 시선은 종수보다 한걸음 먼저가려고 애쓰고 있다. 

종수가 저렇게 뛰는 건 왜 그러는 걸까? 그의 마음엔 어떤 게 있는 걸까? 그가 혜미를 찾는 건 어떤 의미인걸까?

 메타포.. 그래 메타포라고 했어..이 안에 어떤 메타포들이 있는거야? 

처음 칼 장면이 나올 때 그게 복선이라고 생각했어. 어때 결국 맞았지? 

끝부분으로 치달릴수록 허망하다. 그래서.. 이게 뭔데? 이게 결국 어떤 의미인건데?

그레이트 헝거의 춤...


누군가의 해설이 내 궁금증을 풀어준건 아니다.

종수가 어떻든, 벤이 어떻든.. 하루키의 세상과 포크너의 세상이 어떻든...

서로 대치되는 세상이 어떻든...

내겐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마지막 장면 종수의 행동....분노...


그래. 분노였다.. 누가봐도 확연한 분노.

벤이 혜미를 죽였는지 아니었는지..

그 모든게 종수의 오해인지 상상인지 혹은 아예 종수의 창작인지...

그 방법이 옳은지 아닌지...

기-승-전-결이 도대체 있는건지 서사가 있는지 미스테리가 풀린건지...

뭐 그런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분노가 있다...

분노... 표현되어진 분노...


그리고 종수가 되어 생각해보면 난 그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

난 종수와 함께 모욕당했고 종수와 함께 의혹을 품었으며 종수와 함께두려움을 느끼고 방어할 수 밖에 없었다..

난 그들을 질시하고 그들을 경멸하며 그들로 부터 소중한걸 지키고 싶고 그들에게 짓밟히고 싶지 않다..

난 종수가 되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걸 보여주었다.. 그냥..

표현되어진 분노...


옳고 그름. 감정에 옳고 그름이 어디있어..

표현방식의 옳고 그름.... 그런걸 영화에서 따질 이유가 어디있어...


그냥 그렇다..

그게 현실이다...

감정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그 존재만 있을 뿐이다...


Posted by labosq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