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13. 5. 23. 19:53 from 기억한올

# 고교때 은사님을 모시고 몇 몇 친구와 모였다.

선생님이 '과거는 History, 미래는 Mystery야..

현재는 뭔지 아니? Present.. 선물이야' 하신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지만..

술자리에서 정년을 눈앞에 둔 선생님께 들으니 음... 멋지다..

현재는 선물...

오늘 하루를 기쁘게..즐겁게 살자...


# 선생님은 2학년 4반 담임이셨고 

난 2학년 1반.. 그냥 국사만 배웠다..


'그때 난 31살 이었어..뭘 알았겠나? 교육? 암것도 몰랐지...'하시지만

선생으로서 첫 직장이자 첫 담임을 맡으셨던 우리 기수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신다..


'33년 교직 생활에 제자가 이제 만 이천 명이야...'

하시면서도 담임반도 아니었던 

일개 학생에 불과했던 내 이름까지도 다 기억하고 계셔서 깜짝 놀랐었다..


아마도 졸업생들과의 모임이 마련되면 앨범이라도 한번 펴보시는가보다..

첨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 선생님은 그냥 내 이름만 기억하시고 공부 곧잘 하던 모범생쯤으로 알고 계시지만

난 실은 선생님과 즐거운 추억보다는 그렇지 못한 기억이 하나 있을 뿐이다.


난 생김만 얌전했지 진정한 모범생과는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충분히 일탈을 즐기는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마음만 반항아?)

대표적인 반항 행동이란게 수업시간에 딴짓하기..


수업시간에 별다른 특별한 짓을 하는건 아니지만

옆자리 친구와 끊임없이 속닥거리거나

필담을 나누거나

혼자서 만화를 끄적거리거나

그도 아니면 졸기라도 해야하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의 장애수준의 집중력 결핍 학생이었다..


노트필기도 거의 안하고 한동안은 책도 안가지고 다니고 노트도 전과목 한권에 대충 쓰는 흉내만 내고..

암튼 빈가방에 도시락 한개, 분철한 책들, 전과목용 노트 한권..

뭐 이렇게 들고 다닌 기간도 꽤 있다..(가방 무거운 거 싫어서..)


반항이라기 보다..

그냥 불성실...

좀 그랬다..


어쨋든...

그러다보니 선생님들과도 초반엔 좋게 시작하다가

나중엔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곤 했는데

국사 샘과도 예외없이 수업시간에 산만행동 하는게 걸려서 꾸중을 듣기도 했었다.


그때 그 전과목용 노트에 그해의 노벨상 수상작가가 쓴 '세상 끝날의 노래' 라는 시를

신문에서 보고 옮겨 적어 놓았었는데 샘이 내가 딴짓 하는 걸 보시고 그 노트를 뺏어서 

그 시를 보시고 제목이 노래니까 무슨 유행가 가사라도 적어 놓은 줄 알고 꾸중을 하셔서

속으로 샘을 원망하고 '경멸(?)'했던 기억이 있다..

뭐... 그럴 나이였으니까...ㅋㅋ


몇해전부터 샘을 모시고 한해나 두해에 한번씩은 식사 모임을 하곤 하는데

참 좋구나...싶다...

우리의 어린 기억(내 개인의 기억이 아니더라도..)을 같이 공유해주시고

우리 고향 같은 학교를 33년이나 지켜주신 믿을만하고 존경스러운 은사님...

참... 좋다...


# 내 친구는 사람을 특정 음식과 연관시켜 떠올리는 기억법을 가지고 있다..

가령 아구찜을 먹으러 가면 H양이 생각나고 추어탕집에 가면 또다른 H양..

얼마전에 맛있는 루꼴라 피자를 먹으면서 내 생각이 났다고 말해줘서 기뻣다..


그 친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루꼴라를 먹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무슨 샐러드 같은걸 먹은거 같다고..

나 때문에 처음 루꼴라를 알게 되었는데 

'흠...제법 마음에 들었다'고..그렇게 말했다...


난 어디서 루꼴라를 알게 되었을까?

갑자기 궁금하다..

기억은 안나지만 언젠가...꽤 오래전에 동숭동에 이원승이라는 개그맨이 하던 

화덕 피자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루꼴라 피자를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가 처음이었는지 어쨌는지는...잘 모르겠다...


미국에서는 루꼴라를 아르굴라라고 한다..

어느게 어느 나라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츠데일 역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본 친구들과 

아르굴라 피자를 어렵게 시켜먹었던 기억이 있다..


어떤 작가가 역사는 '위로'라고도 했는데

개인의 역사도 역시 작은 '위안'이 될 수 있겠다..


특정 음식과 연관된 기억법..

따듯하고 좋다..


# 오늘을 프레젠트라고 해놓고 난 여전히 기억 언저리를 해메고 있다...


# 인터넷 검색해보니... 나오네..

그 때 그 시..맞아..체슬라브 밀로즈...


세상 끝날의 노래

                                                  <  체슬라브 밀로즈 >

 

 

 

세상 끝나는 날

 

벌 한 마리 클로버꽃 주위를 돌고

 

어부는 빛나는 그물을 깁는다

 

행복한 돌고래, 바다 속에 뛰어들고

 

어린 참새들 처마 끝 홈통에서 논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뱀은 황금색 옷을 입고 있다.

 

 

세상 끝나는 날

 

여자들은 우산 쓰고 들길을 걷고

 

주정꾼은 잔디밭 가에서 존다

 

채소 장수들 거리에서 외치고

 

노란 돛배는 섬에 다가간다

 

바이얼린의 목소리는 공중에 남아

 

별 빛나는 밤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천둥 번개를 기다린 자들은 실망한다

 

조짐과 천사장의 나팔소리 기다린 자들은

 

세상의 끝 지금 진행 중임을 믿지 않는다

 

해와 달 머리 위에 있는 한

 

땅벌이 장미꽃을 방문하는 한

 

장미빛 아이들이 태어나는 한

 

아무도 지금 진행 중임을 믿지 않는다.

 

 

다만, 예언자가 되고 싶었던,

 

그러나 너무 바빠 되지 못한, 한 백발 노인이

 

토마도 줄기 엮으며 계속 중얼거린다

 

세상의 끝 달리 없을 걸

 

세상의 끝 달리 없을 걸.


# 내 기억에 심각한 오류를 발견했는데..

이 시... 세상 끝날의 노래가 8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란다..


그렇다면 그것은 중 3때..

중 3때라면 윤샘이 국사 선생님이 아니고 다른 분..(약간 개구리를 닮은 분..)


허걱...

잠시 이 시가 그해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이라서 신문에 실린건 틀림없지만

다음해(그러니까 81년)에 실린거 아닐까? 의심도 해봤지만..


내가 가방에 분철한 책 서너권, 전과목 노트 한권 들고 다닌 시기라면

중 3때가 맞긴하다.. 그것도 학기 말쯤...


고등학교땐 그 정도는 아니었어...

결국 국사 샘이라는 함정에 빠져 전혀 다른 기억을 이어붙이고 있던 거였어...


즉..윤샘과는 그리 숭악한 기억이 없다는 이야기?

근데 왜 혼자서 맘 불편해 한거지? 헐... ㅠ.ㅠ


근데.. 그 기억을 정정하고 나니

윤샘과의 기억이 정말 없다... ㅠ.ㅠ

 

 


 





Posted by labosq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