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한번으로 약속된 모임 하나는 마냥 즐겁기만 한건 아니다..

의무감이 70%쯤...

약속장소에 나가는 발걸음이 께느른하다...


목적도 분명하고, 같이 어울리기에 불편한 사람들도 아닌데..

그래서 틀림없이 어느 정도의 즐거움은 보장되어 있는데

언제나 변수는 견디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


틀림없이 그 순간이 올 것이고

그 순간의 길이와 그 순간 나의 대응이 그날의 대차대조표가 된다..


어제도 역시 그랬다..

시작은 평이했다..

오랫만의 갤러리 순례는 신선했다..


저녁을 먹을 때쯤 L선생이 합류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술 친구가 생긴 Y대표는 흥이 올랐다..

C와 나는 C의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있었고

때로는 다같이 때로는 따로 따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역시 그 순간이 시작되었다...

노인이 된다는 것..그래서 판단이 흐려진다는 것 그런 이야기 중이었다..


Y가 말했다..'난 정말 그 마음 이해가 가.. 나도 그럴거 같아..

누군가 나를 이해해주는 여자..나를 알아주고 나를 이해해주고...

그게 제일 중요해..'


C가 눙을 쳤다...'그래서 그렇게 바에 가는 거지요?'


'남자는 그렇죠.. 나를 알아주면 정말 좋죠..' L이 거들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한테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이뻐하는 남자한테...'

 Y가 87번쯤 했던 이야기를 한번 더 시작했다...


'다른 사람한테 인정 받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해요?' 내가 그만 못참고 정색을 하고 말해 버렸다..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그래야 살아있는 것 같거든요... 생생하고...' Y가 울부짖듯 말했다...

이 이야기도 88번쯤 되풀이 되는 이야기이다...



#


이야기는 이어졌다..

모두가 좋아했던 K선생 이야기로 해서..나이 듦에 대해서...

각자의 실제 가족들로 해서 세대차이에 관한 이야기들 등 등 등...


그리고 L이 나에게 몸을 돌리고 이야기했다..

'이 선생.. 그러니까 해봐요..'


'아 글쎄 그럴 깜냥이 안된다니까요..'


'아니..그러니까 그런 건 그냥 덤벼야한다니까요? 다들 그렇게 저지르는 거예요..'

C가 거들었다..


'아이..진짜 또 나왔네... 바람잡기의 여왕님이라니까...'내가 말했다...


밀고 당기는 싱갱이가 계속 되었고

Y가 나섰다...


'L선생은 말야... 여자만 있으면 꼭 저렇게 둘이만 이야기하려고 든다니까..

그래서 술 친구로 좋은데 또 좋지 않아..'


'저도 남자니까 여자가 좋죠...' L이 웃으면서 넘겼다..


웃는 얼굴 밑에 은은한 정색의 낯빛을 깔고 이야기들은 계속 됐다..


'K 선생은 말야... 그러다가도 중간에 악살을 넣고 그러면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

중간에 자리도 바꿔주고 그랬어.. 근데 L선생은 말야..'


'아..제가 그랬나요?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

Y는 농담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L은 자칫 어색해질 수도 있는 순간을 웃으면서 잘 넘긴다..



#


Y대표는 늘 그런 식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줄 모른다..


옆에서 보기엔 안타깝다.. 

한걸음만 벗어나면 더 이상 돌리지 않아도 될 바퀴에서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숨을 헐떡 거리며 고단한 다리를 놀리며 나를 좀 봐달라고...

Y대표가 돌리는 쳇바퀴는 지독한 열등감과 허무감이다...


그런데 Y는 혼자만 힘든 게 아니다...

즐겁자고 모인 자리마다 자신의 그 쳇바퀴쇼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쇼가 끝날 때까지는 뿔뿔이 흩어져 제 갈길을 갈 수 조차 없는 구경꾼들이다..


L이 마무리 짓는 방식이 아니었다면 씁쓸한 뒷맛으로 남았을 저녁이었다..

누가봐도 정색의 공격을 (비록 농담의 탈을 썼지만..)

유연하게 잘 수습하는 모습은 그의 연륜인걸까? 성품인걸까?


사회적 기술이라도 그렇고 성격이라도 그렇고...

어느쪽이라도 배우고 싶은 부분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사회적 기술..

연민을 느끼는 따듯한 마음...

어느 쪽도 '그만하면 충분'하게 여겨지지 않는 나라서...


그만하면 충분히 좋은 밤이었다...












Posted by labosq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