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는 외로워

2012. 8. 5. 18:51 from 생각꼬리

#몇해 전 부터 8월 4일이면 대학 동기들 모임이 있어 왔다..우리가 84학번 이므로 그때 그때 날짜를 새로 잡을 게 아니라 아예

8월 4일을 지정일로 만들어버리면 다들 알아서 그 날짜를 되도록 비워둘거라는깜찍한 발상이었다..(똑똑한 것들..) 올해는 4일이

토요일인 관계로 3일로 하루 당겨서 모임을 했다..

 

#난 대학 동기 모임과는 인연이 조금 박한게 여름엔 다들 그렇듯이 휴가철과 겹치기도 하거니와 휴가 정도는 실상 조금 빗겨가게 할수도 있지만 외국에 장기 출타하거나 피치 못할 사정등이 특히나 대학 동기 모임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렇지만 아마도 불참의 가장 큰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참석할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는데 온 힘을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모임을 벌써 두어번 걸렀고 올해는 특히 졸업 이후 한번도 본적 없는 미국 사는 친구가 왔다고 해서 참석했었다..늘 연락하느라고 애쓰는 친구가 기뻐하도록 꽤나 많은 친구들이 모였는데 다들 모아놓고 보니 참 출중하다.. 고등 모임, 중학 모임을 가도 우리 친구들이 동안에, 미모에..나이에 비해 어디가서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는데 대학동기들은 한마디로 '알파'다.. 대부분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뭐 하나 빠지지 않는다.. 외모도 빼어나고 직업도 좋고 배우자도 잘 만난 애들이 자식까지 잘 키웠는데 거기다 술도 잘마시고 노래까지 잘한다.. 그런 애들이 즐비하다...

 

#그 모임에 가면 난 직업이 없어서 한번 주눅 들고, 술을 잘 못 마셔서 두번 주눅들고, 노래 시킬까봐 불안에 떨며 세번 주눅든다..그래서 한쪽 귀퉁이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나랑 똑같이 술 안마시고 일찍 일어서는 친구와 조용히 퇴장한다..퇴장할때는 인사도   남기지 말아주는게 예의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모임에 나가는 걸 거르거나 가도 조용히 있다가 일찍 퇴장하는 이유는 이렇게 자명하다.. 일적으로 얽힌 일이 없으니 화제거리도 별로 없고, 옛 추억을 노닥 노닥 수다떨기엔 얽힌 추억이 별로 없으며, 아무 생각없이 음주가무를...난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즐기고 싶어도 일단 안된다...ㅠ.ㅠ   그러다보니 형식적으로 얼굴을 내밀고, 형식적으로 안부를 묻고, 형식적으로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뜨듯하게 뎁혀진 자리를 뒤로 하고 집에 가는걸 기꺼워하며 귀가길에 오르는거다...

 

#그렇다고 이 모임에 나오는 친구들이 자랑질이나 해대는 삼척동자, 진상들이냐..그런건 아니다..그렇게 멋모르는 인간들.. 아니다.. 하나 하나 뜯어봐도 별로 나무랄게 없는 일반적인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다.. 다만 문제는 20여년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피차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는 공통점도 없고, 공유해야만 할 어떤 무엇도 없는데, 거기에 그닥 끌리는 점도 없다는 거다..나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고 그들도 내게 관심이 없다..

 

#20여년전..수업을 같이 듣고 과제를 같이 하며 같이 시간을 보냈음에도 끈끈한 무언가를 쌓는데 실패했는데 서로의 생활이 많이 달라진 지금..그게 가능할리가 없지 않은가..

 

#왜 그 친구들과의 관계맺기에 성공하지 못했을까? 지금이야 생활이 달라졌으니 새삼스레 새로 관계를 맺는다는게 서로 많이 끌리거나, 필요하거나, 그래서 노력하거나 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당시 적당한 관계를 맺어놓았더라면 그리고 유지해왔더라면 그 중 몇몇은 나의 절친중 하나였을 수도 있는데...절친으로 두고 싶을만큼 외형적으로는 충분히 매력있는 아이들인데...

 

#그렇게 겉돌기만 했던건 아니다..나랑 같이 모임에서 일찍 일어섰던 친구들과 따로 커피타임을 가졌다..그 친구들은 대학 시절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듣고, 거의 매일 얼굴을 보고, 같은 선배 들을 쫓아다니며 밥 사달라고 조르고, 우리 남편과 그 친구 무리    들과도 같이 어울렸던 실상 '절친'이 될수도 있는 친구들이었다. 졸업 후 20 여년 동안 일년에 한 번이든 2~3년에 한 번이든..얼굴보고  소식 물으며 살던 친구들이기도 하고..

 

#술도 잘 안마시고 노래도 못하고 그나마 나랑 제일 비슷하기도 하고 서로 가장 편안하기도 한 친구들이지만 왠일인지 그 긴 세월이 지나도 '절친'은 아직 아닌 친구들..

 

#언제나처럼 많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이 친구들과의 대화를 보자면 서로 가식적인 것도 아니고, 숨기는 것도 아니지만 늘상 '여기까지~' 비슷한 느낌이 있다..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절대 넘어서지 않는 느낌..누구와 해도 할수 있는 이야기들을 친근함과 편안함이란 양념으로 살짝 버무려서 '우정'이란 포장안에 넣어놓은 듯한...서로의 가족도 알고 이리 저리 얽힌 추억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친구가 우리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물었다..'너넨 속내를 털어 놓을수 있는 친구가 있어?' 질문을 한 그 친구는 같은 종교를 가지고 20여년 같이 겪고 지내온 몇몇과 속내를 나눌만하다 하였고 다른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나는?   나는 당당히 '있어..몇몇...' 흠..나는 있다...다행이도..

 

#내가 내 대학 동기들에게 관심없는 이유의 핵심이 바로 이게 아닐까? 속내를 나누기까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린다..어렵고 힘든일, 속상하고 부끄러운 일, 약점들과 자존심 다치는 수많은 기타 등등들...그것들을 혼자서 인내하며 참고 견딘다...다른 사람들에겐 늘 좋고 편안하고 반듯한 모습들만 보여준다..

 

#삼십년 전부터 이 친구들은 그런 느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묵묵하고 참을성있고 반듯하고 모범적이다..성실하고 근면하고 목표를 열심히 추구해가느라 좀 바빠서 쓸데없이 낭비할 시간도 별로 없다..일년에 한두번 밥 한끼 먹으면서 아무에게도 해가   안되는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 나누는 관계라면 가장 이상적..

 

#사실..이 친구들에겐 나도 똑같을거다..그래서 이 친구들도 내게 관심이 없다..우린 서로 서로 관심이 없다...

Posted by labosq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