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기억

2015. 2. 20. 00:27 from 기억한올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와 진짜 내가 다 다르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부분들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인가?)

그 중 하나가 내가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알고보면 이성적인게 아니라 단순히 감정의 분화가 잘 안된 것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감정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해야하나?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거나 진지하게 조망해주지 않거나 무시하고 억누르거나..

그러면서 그 책임을 이성에 전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내게 격렬한 감정은 주로 분노와 짜증인듯하다...

분노를 폭발시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 눌러 참은 화와 그로 인한 짜증...

그게 명절을 보내는 내 주된 정서...


그닥 즐겁지 않은 나 자신을 간신히 힘내어 의례적인 미소로 포장하고...

뭐 그럭저럭한 설날이었다... (언제나와 비슷한...)


작년쯤 부터...

나도 당당히 명절 오후에 친정에 가겠다고 선언했더랬다...

결혼한지 20년이 넘고 부터는 무슨 말을 할 때 가슴이 떨려서 못하지는 않는다...

(뭐 하고나서 여전히 가슴이 콩콩 뛸 때도 아직 있지만...)

남편은 '무슨일이 있어도 2시에는 출발하도록 하겠다'라고..

어제 시댁에서 돌아오면서 이런 저런 궁리와 요구를 하는 나에게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오늘..

아주버님들과 어머님을 모시고 드라이브를 갔다가 2시 반이 되어서야 돌아왔고

머리로는 뭐 그닥 화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었다...

굳이 화를 내어 친정집 가는 길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는데

또 한편...어딘가..누군가에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화를 냈다...

생각하는 그대로 '화가 나서 화풀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너무 너무 짜증이 난다'고 말했다..

'화가 나니까 말 시키지 말라'고도 했다...


왜 이렇게 지나치게 화가 날까 생각하다보니

결혼하고 계속 되풀이 되어 온 비슷비슷한 일들과 그때의 감정들이 물 밀듯 올라오는 걸 

비로소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오늘의 감정은 오늘 만의 감정이 아니었고

바로 그 과거의 감정의 기억들이었다..(정말 생생했다... )


결혼하고 미국에 갔다가 처음 한국에 나왔던 여름 방학...

시댁에 머물면서 친정집에 너무 너무 가고 싶은데 시부모님은 보내줄 생각을 않고

간신히 말을 꺼내어 사흘 말미를 얻어서 (한달중에!) 출발하려는데

남편은 늑장을 부리고...길은 멀고 차는 막히고...

너무 너무 속상하고 서럽고 안타깝고...답답하고 갑갑했던 그 길의 기억..


매번 비슷하게 되풀이 되는 상황과 되풀이 되는 감정..

그 감정들이 첩첩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별것 아닌 일에도 둑이 터지듯 밀려온다..

세세하게 구별되지 않은 알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분노...


그런 이야기를 꺼내자 남편은 말이 없다...

과도한 화와 짜증을 이해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내 마음은 풀린다...

그랬구나...

젊었던 내가 그렇게 서러웠구나....

그렇게 조바심 나고 안절부절했구나...


이렇게 묵은 감정 하나가 풀려나간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 풀어져서 후에 또 비슷한 상황이 와도 그냥 여유있게 하하 웃어버릴 수 있을지 알수없지만...

왜 내가 별것 아닌 일에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는지 알게 됐으니까..


조금 더 편안해지면 좋겠다...


Posted by labosq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