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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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가? 평소처럼 할 일은 즐비하다...
단지 엄마를 보러 가는 일이 면제되었을 뿐...
시동을 켜놓고 차 위에 소복히 쌓여있는 눈을 털어내고 있는 중
다시 눈발이 날린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꼼짝할 수 없다...
전화를 했더니 '오지 마~ 날도 추운데 뭘 오니?' 한다..
'눈 오면 못 움직이고 내일이나 모레나 눈 안 오면 갈께~' 했더니
'날 풀리면 와..추운데 뭘..'한다..
'나 다음 주에 미국가는데?' 하자
'그래..다녀와서 날 따듯해지면 와..괜히 추운데 고생하지 말고...'한다...
'그러면 한달도 넘는건데...'는 마음 속으로 삼키고...
'그러면... '하다가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할께...'라고 하고 말았다...
왜... 그 배려가...
마음이 상할까?
지난 주 늦은 아침, 잠자리에서 밍기적거리고 있을 때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날 추우니까 오지 말라고..
'알았어.. 그럼 그럴께..' 해버렸다...
엄마의 배려는 진심인걸까?
아니면 그냥 흔하디 흔한 겸양의 표현인 걸까...
늘 의심스럽다..
이중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건 나의 편견인 걸까?
그냥 진심으로 받기로 했다...
빠릿 빠릿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딸에게 느끼는 서운함은 엄마의 몫..
그런데 왜 내가 화가 나는건지...
이중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 행간을 읽는 수고를 해야하는 데서 오는 짜증...
행간을 제대로 읽어내야 받을 수 있는 칭찬...
눈치빠른 아이로 자라게 만든데 대한 분노...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느껴질 죄책감...
배려를 배려로 받지 못하는 부분, 감사를 모르는 부분은 나의 문제다..
그냥 고맙게 받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이시간은 망중한....
그새 눈이 그치고 해가 나니 마음이 슬몃 불편하지만...
뭐... 그거야 내 탓은 아닌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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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골목길...
새로 상담을 시작한 센터는 창신동 어디쯤에 있다..
지하철역에서 4~500m 쯤 골목을 따라 올라가는데
초입은 완만한데 마지막 1/3쯤은 꽤나 가파르다..
창신동은 내게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어렸을 때.. 최대로 잡아 초등학교 저학년때 정도 쯤..
작은집이 창신동이었다..
어릴 때는 특히 학교 다니기 전까지는 우리 형제들.. 그중 특히 나는
친척집을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또래의 사촌들, 언니, 오빠 들이 많아서 명절이나 제사때 모이면 왁자하게 놀다가
자기 집 가는 사람들의 치마꼬리에 붙어서
'우리 집 가서 놀래?' 한마디에 강아지 새끼모냥
줄래 줄래 따라나서기도 참 많이 했었다...
며칠씩 자고 오고 그게 길어져서 한달씩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자고 오는 일도 있었다..
어쨋든...
창신동은 그 무렵 작은 집이 있던 동네였고..
나랑 언니랑? 혹은 나랑 남동생이랑? 정확하진 않지만 사촌들이랑 놀다가 차마 못헤어져서
같이 놀러 갔었다..
그리고 한 밤중에 다 같이 연탄가스를 마셨다...
아마도 어른들이 머리가 아파서 먼저 깨시고
한 방에 죽 누워자던 아이들을 다 흔들어 깨우셨는데..
그리고 얼른 방 밖으로 탈출하여 동치미 국물 원샷을 했는데..
나보다 어린 동생 둘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이 곧 부숭부숭 일어났는데
유독 나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듯하다..
작은 아빠가 나를 들쳐업고 작은 엄마는 잠옷 바람에 스웨터만 걸치고
창신동 골목길 언덕을 내달아 달려 한 길가에 불켜진 의원을 찾아 헤매고 다니셨다...
워낙 일찍 잠자리에 들던 시절이라..(8시면 불 끄고 누웠으니까..) 한 잠 자고 난 것 같은데도
몇 시 안 되었던 건지..(9시쯤?) 아니면 밤 새 여는 병원이라도 찾으셨던 건지 확실치 않지만..
(느낌상 전자였던 듯...)어쨋든 다행히 한 병원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난 난생 처음 입원이란 걸 해봤고...
링겔이란 것도 맞아봤는데 양쪽 팔에 아무리 찾아도 혈관이 안 나와서
주사 바늘을 몇차례씩 찔렀다가 결국 발목 복숭아 뼈 아래 쯤에 바늘을 꽂았다..
한번씩 찌를 때마다 간호사가 미안한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던 걸 기억한다...
작은 엄마는 가끔 그 때 얼마나 놀래고 가슴을 쓸어내렸던지 이야기를 하시지만
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내게도 그 밤 풍경이 의외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작은 엄마의 분홍색 원피스 잠옷과 그 위에 걸쳤던 큰 꽃무늬가 있는 스웨터까지 기억이
날 지경이다..
등에 업혀있을 때 밤거리를 내달리는 작은 아빠의 가쁜 숨소리와
비탈진 어둑한 골목길.. 큰 찻길을 따라 불꺼진 거리를 다급하게 헤매면서
셔터가 내려진 작은 병원들을 두들기던 일.. 두들김에 챙그랑 챙그랑 철문이 흔들리던 것들..
어둑한 거리에 뿌옇게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지나다니던 버스들..
밝고 환하던 한 병원...
아! 나를 들쳐업고 집을 나설 때 졸린 눈을 비비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란히 서서 작은 엄마, 아빠와 나를 배웅해주던
사촌들과 내 형제들.. (지금 생각하니 언니는 확실히 있었던 듯 하다.. 언니가 제일 나이가 많아 작은 엄마가 아이들만
두고 집을 비우며 뭔가 신신당부를 했던 듯..)
뭐 그런 그런 장면들이 안개에 싸인듯 뿌옇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다..
창신동 골목길을 걷다보니 그 기억이 떠오른다..
뭐 지금 내가 오르내리는 창신동 골목길은 40년도 더 전 그때 그 곳은 전혀 아닌듯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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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책들..
방학을 맞아 제일 즐거운 일은 역시 읽고 싶었던 소설들을 읽는 것...
여행 준비물로 크레마를 찾다가 열린 책들 세계문학전집 180권을 함께 주는 프로모션을 발견했다..
앗싸... 득템...
그 동안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거미여인의 키스>를 지면으로 읽었고
<원수들, 사랑이야기>를 재독 (엄밀히 말하자면 삼독) 했고..
크레마로 <캉디드>와 <여인의 초상(상,하)>를 읽었다...
이북도 볼만하다... 적어도 크레마로는....
썩 마음에 든다...
그렇다고 종이 책을 사는 걸 멈추지야 않겠지만..
확실히 엄청나게 줄일 수는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여행 짐이 간편해졌다..
요즘 왜 바쁜가 했는데..
물론 실습이며 스터디며 방학이래도 여전히 해야하는 일과 하고 있는 일들이 있긴 하지만...
내가 책을 읽고 있구나...
흠... 바쁠만 하다...